#383

A에게.

태평양! 당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이겠지.
이 거대한 바다에서는 내가 탄 이 거대한 철선마저 그냥 한조각 쇳덩어리처럼 보일 때가 많아.
그걸 우리는 항공모함이라는 단어로 부르는데 당신에게는 생소할지도 몰라.
바다 위에 떠 있는 비행장 같은 것이고, 평평한 갑판 위에 작은 관제탑 같은 것이 서 있는 그런 배라고 보면 돼(내가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린 그림을 보길 바래).

나는 일과가 없을 때에는 종종 갑판위로 올라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는 하는데, 이 망망대해에서 해가 뜨고 질 때의 그 풍경은 정말 장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 그걸 볼 때마다 당신도 이 것을 꼭 봐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
사실 내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지만, 늘 당신과 이 풍경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채워지지 않은 마음 덕분에 늘 새로움을 느껴.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나 할까.
내가 타는 비행기는 뇌격기라고 불리는데, 어뢰를 싣고 가서 적선을 공격하는데 사용되는 비행기야.
(어뢰라는 것은 프로펠러가 달린 폭탄 같은 것인데, 비유하자면 바다 위로 떨어드리면 수영을 하듯이 나아간 후 배에 부딪히면 폭발하는 그런 것이야. 내가 그린 그림을 보길 바래.)

내가 타는 비행기는 파괴자(Devastator)라는 이름을 가졌어.
멋지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파괴당할 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농담을 해.
이 고약한 비행기는 적기에 비해 너무 느려서 타고 있는 내내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든.
그리고 내 임무는 시속 130마일 정도의 속력을 유지하면서 고도를 내린 채 직선으로 된 매우 단조로운 경로로 비행을 하는 것인데, 이건 어떤 때에는 마치 자살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제로기들이 우리를 보면 너무 좋은 먹이감처럼 보일거야.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
우리 비행기에는 후방사수가 있고, 부지런한 이 친구들이 적기를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는 한 무기력하게 당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 우리와 함께 비행할 전투기(야생고양이라는 이름을 가진)들이 파리 같은 제로기들을 쫓아줄 테니까.

물론 남들에게 내 운명을 맡긴다는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이것이 삶의 본질이 아닐까?
내 삶의 모든 것을 모두 내 뜻대로 이룬다는 것은 결국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비행을 거듭할 때마다 커지고 있어.

내 비행기를 정비하는 정비사들, 내게 무선을 보내는 관제사들, 나와 함께 비행하는 편대원들 모두에게 나는 내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니까.
높으신 분둘의 작전계획이나 제로기 조종사의 조종술, 후방사수의 사격실력과 컨디션, 적선의 대공포 사수의 운 같은 것들이 내 삶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해.

어쩌면 내가 오직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내 부모님을, 동생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그 정도가 아닐까.
살아서 당신에게 돌아가겠다는 말은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몰라.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갈게.
언젠가 꼭 당신과 이 바다의 일출과 석양을 함께 바라보고 싶어.
그러면 당신도 오늘의 내 사랑을 기억하게 되겠지.

1942년 6월 1일. 항공모함 호넷(CV-8 Hornet)에서
진심으로 당신의 것인,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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